한국농구KBL
대한민국에 농구를 보급하고 활성화 하기 위하여 조직된 기구이다. 한국농구연맹이 프로 리그만을 전담한다면, 국가대표팀과 아마추어 및 생활체육 농구, 그리고 인프라 등은 대한민국농구협회에서 담당한다.
그러나 조직상으로 볼 때 대한민국농구협회는 국제농구연맹(FIBA)이 인정한 한국 내 유일한 단체이며 한국농구연맹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협력 단체의 성격을 지닌다. 2022년 기준 서울의 경우 남초부 4개 학교가 있으며 여초부도 2개교밖에 없을 정도로 저변이 약해졌다. 이로 인해 수도권 명문 고교 구단은 지방의 초중 농구선수들을 끌어모아 지역 농구계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산하 연맹으로 한국실업농구연맹(회장 주희봉), 한국대학농구연맹(회장 김동욱), 한국중고농구연맹(회장 박소흠), 한국초등농구연맹(회장 오재명)이 있으며, 원로 농구인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농구인동우회(회장 정연철)와 한국어머니농구회(회장 홍영순)가 활동 중이다.
2016년 1월 19일, 대한농구협회와 전국농구연합회가 통합 협의를 가졌다. 통합된 단체의 명칭은 대한민국농구협회(Korea Basketball Association)로 변경되며 1월 23일에 첫 통합 총회를 가졌다. 8월까지는 분리운영을 하며, 9월부터 통합회장을 선임한다고 밝혔다. 초대 통합회장에 방열 대한농구협회 회장이 그대로 선출되었다.
협회 논란
방열 회장은 취임 이후로 일부 농구팬들의 반감을 받았는데, 명색이 국가대표를 책임지는 협회라는 곳이 국가대표 지원에는 예산문제로 인색했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일화들이 농구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든다.
남자농구대표팀 선수단 버스가 마을버스보다 작아서 허훈이 이를 저격하는 게시글을 남겼다.
여자농구대표팀 에이스인 박지수가 연습 때 옷을 또 입고 훈련해야 했다며 성토를 했다.
여자농구대표팀 식사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 이를 불쌍히 여긴 도시락 업체가 개인적으로 대표팀을 지원했다.
그나마 2020 도쿄 올림픽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혹사 논란이 있던 이문규 감독을 재빨리 경질하고 전주원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으로 앉혀, 비록 3패했지만 대표팀의 경기력이 예선 때보다 올라와 긍정적인 의견이 나올 뻔 했으나, 여자농구대표팀의 경기력을 강호들과 맞설 정도로 끌어올린 전주원 감독의 재계약을 팬들 모두 예상하거나 바랐음에도 새로운 전임감독을 뽑는다는 발표를 하며 농구팬들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물론 전주원 감독은 현역 프로팀 코치이기 때문에 대표팀에 집중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본인도 이를 말하며 고사하기도 했지만, 농구팬들이 화나는 건 최소한 전주원 감독과 접촉이라도 해봤어야 했는데 왜 다시 감독을 뽑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이 새 전임감독 선임 발표를 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전주원 감독의 소속팀인 우리은행과 잘만 협의하면 전주원 감독이 여자농구대표팀을 이끄는 데 큰 문제가 아님에도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전주원 감독은 더 이상 국가대표팀 감독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보니 결국에는 다음 대회일정까지 얼마 남지 않아 정상적으로 대표팀 공모에 나선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협회가 잘못한 부분은 아니다.
코로나19를 이유로 2023 FIBA 월드컵 예선을 일치감치 포기해 실격당했다. 이 대회는 올림픽 다음으로, 가장 대표적인 대회인 올림픽이 참가국이 워낙 적은지라 한국으로서는 사실상 출전이 어렵기에 그나마 유일하게 참가 가능한 세계 대회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대응가능했던 코로나19를 문제로 아예 대회를 포기하는 바람에 큰 욕을 먹었다. 게다가 당시 코로나19가 더 심했던 국가들은 잘만 예선에 참가해 본선에 진출했다.
역대회장
역대 | 이름 | 재임 기간 |
초대 | 이묘묵 | 1945년 12월 19일 ~ 1952년 2월 7일 |
2대 | ||
3대 | ||
4대 | 임봉순 | 1952년 7월 ~ 1956년 2월 |
5대 | ||
6대 | 갈홍기 | 1956년 2월 ~ 1957년 4월 |
7대 | 임봉순 | 1957년 4월 ~ 1961년 7월 14일 |
8대 | ||
9대 | ||
10대 | 박영준 | 1961년 7월 15일 ~ 1963년 1월 |
11대 | 박진석 | 1963년 1월 ~ 1964년 4월 |
12대 | 김창규 | 1964년 4월 ~ 1964년 11월 |
13대 | 이병희 | 1964년 11월 ~ 1980년 9월 |
14대 | ||
15대 | ||
16대 | ||
17대 | ||
18대 | ||
19대 | ||
20대 | 이동찬[5] | 1980년 9월 ~ 1983년 1월 24일 |
21대 | 서성환[6] | 1983년 1월 25일 ~ 1985년 9월 |
22대 | 김상하[7] | 1985년 9월 3일 ~ 1997년 2월 |
23대 | ||
24대 | ||
25대 | ||
26대 | 최현열[8] | 1997년 2월 ~ 1999년 2월 |
27대 | 이종완 | 1999년 2월 ~ 2001년 7월 |
28대 | ||
29대 | 홍성범 | 2001년 11월 23일 ~ 2004년 3월 23일 |
30대 | 이종걸 | 2004년 5월 6일 ~ 2013년 2월 |
31대 | ||
32대 | 방열 | 2013년 2월 ~ 2021년 1월 |
33대 | ||
34대 | 권혁운 | 2021년 1월 ~ 현재 |